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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슬프도록 깊고 아늑한 침묵의 문, 윤형근의 천지문(天地門) |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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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색이 섞여 이루는 거대한 사색의 여백. 밝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온종일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밤, 우리는 종종 거실의 불을 모두 끈 채 가만히 어둠 속에 앉아 있곤 합니다.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고, 오롯이 나만의 숨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기묘한 안도감. 그것은 어둠이 지닌 아늑한 포용력 덕분일 것입니다. 눈을 자극하는 빛들을 걷어낸 자리에 남겨진 잔잔한 어둠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가장 고요한 방이 되어줍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 화백의 캔버스 는 바로 그 깊고 아늑한 어둠 을 닮아 있습니다. 거대한 검은색 기둥들이 화면을 묵묵히 지키고 선 그의 작품들 앞에 서면, 차가운 단절이 아닌 어머니의 품 같은 깊은 침묵의 안식 이 밀려옵니다. ANUKAM 매거진이 주목한 단색화의 세 번째 숨결, 윤형근의 예술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봅니다. 재료의 미학 ... 면포와 마포, 물감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무구한 바탕 서양의 전통 회화에서는 캔버스 천 위에 '제소(Gesso)'라는 흰색 아크릴 밑칠을 두껍게 바르는 것이 상식입니다. 천의 구멍을 빽빽하게 메워 물감이 스며들지 못하게 막고, 표면 위에 물감을 온전히 얹어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윤형근은 이 인위적인 방어막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생 면포(Cotton)나 마포(Linen) 를 있는 그대로 화판 위에 올렸습니다. 밑칠이 없는 거친 천은 누런빛과 성긴 결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마치 자연의 흙벽이나 오래된 고목의 표면을 연상시킵니다. 작가에게 천은 그림을 그려 넣는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찾아오는 물감을 편견 없이 빨아들이는 '대지' 그 자체 였습니다. 자신을 과시하듯 표면 위에 겉도는 물감이 아니라, 천의 조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재료와 물감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무구함. 인위적인 조작을 최소화하고 사물 고유의 순수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