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점과 선이 열어젖힌 고요한 대화, 이우환의 여백 | Vol. 5 (End of Season 1)

나와 세계가 가장 정갈하게 조우하는 공간의 미학

화려하고 멋진 가구들로 방을 가득 채웠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했던 날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사를 가기 전, 텅 빈 거실의 새하얀 벽과 서늘한 공기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숨통이 탁 트이던 역설적인 순간을 기억하나요. 무언가를 끝없이 더하고 채워야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숨 가쁜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 놓은 작은 강박일지도 모릅니다. 캔버스를 빽빽하게 채우는 서양화의 숨 막히는 화면에서 벗어나, 아주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김으로써 우리 영혼이 숨 쉴 거대한 사색의 여백을 선물하는 예술가. 바로 한국 단색화의 거대한 산맥, 이우환 화백입니다.

ANUKAM 매거진이 오랜 시간 준비해 온 단색화 시리즈의 다섯 번째 페이지는, 격동의 시대를 지나온 거장들이 걸어온 고독한 비움의 여정, 그 위대한 마침표인 그의 '여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욕심을 내려놓고 멈추어 선 그 빈자리에서 시작되는 공간과의 나직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채우지 않아도 이미 완벽한 내면의 안식처를 마주하게 됩니다.


시작(Origin) : 점(Point)과 선(Line), 생성과 소멸을 품은 우주의 호흡

이우환의 예술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정직한 뼈대는 바로 '점'과 '선'입니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점으로부터(From Point)>와 <선으로부터(From Line)>를 마주하면, 캔버스 위에 일정한 호흡으로 찍히고 그어진 푸른 흔적들과 만나게 됩니다. 붓에 푸른 물감을 듬뿍 묻혀 첫 점을 찍거나 선을 내려 그을 때, 화면에는 지독할 정도로 짙고 선명한 청색이 피어오릅니다. 하지만 붓이 나아가고 물감이 다 할 때까지, 그 색채는 점점 흐려지다가 마침내 아스라히 화면 속으로 소멸해 버립니다.


ANUKAM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우환의 점과 선은 차가운 기하학적 도형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이 이 땅에 찾아와(생성),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가 마침내 대자연으로 잔잔하게 돌아가는(소멸) 우리 삶의 순도 높은 호흡입니다. 인위적으로 영원함을 꾸며내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쇠락과 비움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갈한 태도. 그 정직한 소멸의 과정이 역설적으로 지친 우리에게 깊은 촉각적 안도감을 선사합니다.


조응(Correspondence) : 최소한의 행위, 붓을 멈춘 자리에 피어내는 다정한 대화

9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조응(Correspondence)>과 <대화(Dialogue)> 시리즈로 넘어가면서 표현의 극단적인 절제에 도달합니다. 커다란 흰 캔버스 위에 단 한두 개의 거대한 회색 붓자국만 툭 남겨 둘 뿐입니다. 얼핏 보면 너무 쉽게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은 고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서양의 미니멀리즘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동양의 '관계 미학'이 숨어 있습니다.


작가는 늘 "내가 그린 부분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의 여백은 내 붓 자국과 공간이 만나 일으키는 떨림"이라고 나직하게 말합니다. 화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화면 전체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붓을 멈춘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캔버스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와 따스한 빛,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의 깊은 숨소리가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이 지어낸 이 아늑한 여백은,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에 가장 고요하고 다정한 대화의 장을 열어줍니다.


피날레(Finale) : 이우환의 여백, 내 마음의 숨통을 터주는 정서적 안식

박서보가 지우고, 하종현이 밀어내고, 윤형근이 번지고, 정상화가 메우며 달려온 '나를 비워내는 고독한 수행'은 결국 이우환의 '여백'에서 완벽한 문을 열어젖힙니다. 이우환의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공허나 결핍이 아닙니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내면의 복잡한 번뇌와 과잉된 소음들이 정좌하듯 차분하게 가라앉는, 정서적 에너지로 가득 찬 따뜻한 공간입니다. 나를 억누르던 세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나와 세계가 가장 투명하게 마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아늑한 사색처가 바로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치며 : 시즌 1을 닫으며, 그리고 시즌 2 '질감의 위로'를 향한 다정한 마중물

격동의 한국사라는 어두운 밤을 통과하며, 캔버스 위에 '나'를 철저히 비워내어 영원에 도달하고자 했던 1세대 거장들의 숭고한 대장정. [Season 1. 비움의 시원(始原)]이 이우환의 여백을 끝으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 다섯 거장이 일구어 낸 위대한 정신적 토대는 우리에게 '덜어내는 안식'이 무엇인지 확고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권영우 '무제', 1984작>

<이동연 '사이-여백', 1991작>

이제 ANUKAM 매거진은 이 단단한 비움의 토대 위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과 공간에 한 걸음 더 다정하게 다가가는 [Season 2. 질감의 위로(慰勞)]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글로벌 미술계가 주목하는 수많은 포스트(Post) 단색화가들 중, ANUKAM이 다음 다섯 거장(이진우, 김택상, 장승택, 김춘수, 남춘모)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의 캔버스는 차가운 평면을 넘어, 우리의 손끝이 닿았을 때 느껴지는 촉각적 온기 자연의 숨결을 공간에 그대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차가운 예술을 넘어, 오늘 우리의 거실과 침실에 들여놓았을 때 공간의 공기마저 따뜻하고 아늑하게 바꾸어 줄 '살아 있는 질감'의 거장들입니다.


시즌 2의 찬란한 포문을 열 첫 번째 주인공은, 숯의 검은 상처를 한지의 단단한 온기로 겹겹이 덮어내며 거대한 대지의 질감을 일구어낸 이진우의 '지층' 이야기입니다. 흙과 나무, 그리고 인간의 오랜 노동이 만나 우리 공간에 가장 묵직하고 평온한 위로를 전할 그의 대지적 숨결을 가만히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오늘 밤은 이우환의 여백을 마음에 담고, 당신의 지친 영혼이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작은 빈 공간을 허락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ANUKAM : 삶을 아늑하게 큐레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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