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마음속 심연을 비추는 거울, 오병욱의 바다

수직의 세상에서 수평의 안식을 마주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온통 수직의 세계입니다. 위로 더 높이 치솟으려는 빌딩들의 숲, 앞선 이를 기어이 앞지르려는 수직적인 경쟁과 들끓는 욕망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늘 팽팽하게 긴장시킵니다. 끝없는 상승이 주는 피로감 속에서 우리는 문득, 마음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무한한 평면을 갈망하곤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나,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아득한 지평선 같은 곳 말입니다.

여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수평선 하나만을 바라보며 바다를 그려 온 사기장 같은 화가가 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거장 오병욱 작가입니다. 경북 상주의 한 호젓한 폐교 작업실에서 세상의 소음을 지운 채 그가 길어 올린 바다는, 단순한 자연 풍경의 재현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치열한 하루를 보낸 우리 내면의 가장 아늑한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다정한 정서적 초대장입니다.


격렬한 노동이 이룬 역설적인 고요

오병욱의 바다는 아득히 고요해 보이지만, 그 캔버스에 바짝 다가서는 순간 우리는 어마어마한 수행(修行)의 흔적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작업은 결코 매끄럽거나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온몸의 근육을 격렬하게 사용하는 숭고한 노동의 산물입니다.
  • 바다의 뼈대를 세우는 일 
먼저 캔버스 위에 두터운 반죽을 올린 뒤, 넓적한 붓으로 수천 번을 내리치며 흙의 살결 같은 울퉁불퉁한 요철(凹凸)을 만들어냅니다. 화면 위에 물리적인 결을 새겨넣는 묵묵한 다짐입니다.

  • 지독한 동(動)의 끝에서 도달한 정(靜) 
그 위에 가느다란 붓을 쥐고 은갈치의 등 무늬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물감을 팔과 어깨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수백, 수천 번 겹쳐 뿌려댑니다. 


평론가들이 액션 페인팅의 거장 잭슨 폴록보다 격렬하고, 인상주의 쇠라의 전묘(點描)보다 촘촘하다고 평하는 이 고된 행위의 끝에서 비로소 바다의 눈부신 '윤슬'이 탄생합니다. 무수한 물감의 파편들이 서로 엉키고 설키며 일궈낸 이 역설적인 고요는, 조명의 위치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다른 얼굴로 일렁입니다. 지독한 움직임의 끝에서 비로소 도달한 깊은 평온입니다.

수평선이 전하는 정서적 인테리어

화가가 그토록 오랜 시간 수평선에 집착해 온 이유는 명확합니다. 수평선은 하루의 끝에 지친 몸을 뉘어 잠자리에 들 듯, 격앙되던 우리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시각적 안식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위를 향해 치솟으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옆으로 가만히 눕는 선입니다.


그의 그림 앞에는 복잡한 미학적 이론이나 난해한 해석을 위한 웅장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시각적 장치들을 과감히 비워내고 오직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 경계를 잇는 가느다란 선 하나만을 남겨두었기에 독자는 온전히 화면 그 자체에 침잠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전시장에는 마치 진짜 바다 앞에 멈춰 선 것처럼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그림을 응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색을 넘어선 깊은 명상이며, 거친 세상에서 날카롭게 할퀴어진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아내는 정서적 인테리어의 순간입니다.


주관적 색채가 소환하는 각자의 바다

오병욱 작가는 카메라처럼 어딘가에 실재하는 바다를 기계적으로 복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객에게 구체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내면에 존재하는 상상 속 바다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나직하게 고백합니다.
  •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빛의 변주 
'바다는 푸르다'는 시각적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은은한 녹색, 몽환적인 자홍색, 심지어 찬란한 금빛으로 번져가는 그의 바다는 철저히 주관적인 기억의 풍경입니다.


  • 공간의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프레임
사각형의 틀을 벗어나 최근 그가 선보이는 '아치형(Arch) 캔버스'는 마치 아늑한 방 안의 창문을 열어젖혀 거대한 세계를 마주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합니다. 
 

그의 바다는 완벽하게 닫힌 예술이 아닙니다. 관객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 있던 기억의 조각 —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특별한 노을이거나 지친 일상 끝에 간절히 꿈꾸던 안식처를 투영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열린 세계입니다.

마치며 : 나만의 안식처를 가만히 들여놓는 시간

오병욱의 바다 앞에 서면 어디선가 잔잔한 파도 소리가 밀려오고, 아득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경험합니다. 눈으로 보았으나 온몸의 감각이 함께 깨어나는 것입니다.

ANUKAM이 지향하는 아늑함의 본질은 무조건적인 고립이나 단절이 아닙니다. 세상의 수직적 속도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평온한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한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작위적인 외침을 지우고 묵묵한 수평선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그림을 바라보며, 오늘 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가장 평온하고 아늑한 바다를 가만히 꺼내어 마주해 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완전한 안식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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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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