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뒷면에서 밀어 올린 토속적인 온기,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 | Vol. 2

물질과 신체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이루는 안식

세상이 온통 매끄럽고 정돈된 것들로 가득할 때, 우리는 종종 알 수 없는 차가움을 느낍니다. 결점 하나 없이 세련되게 마감된 도시의 빌딩들,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디지털 화면들 사이에서 우리의 시선은 방황하곤 하지요. 완벽함이 주는 긴장감에 지쳐 집으로 돌아온 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어쩌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아니라, 세월의 결이 깃든 거친 나무 테이블이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흙벽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하종현 화백의 예술은 우리가 잊고 지내던 그 투박하고 정직한 물질의 온기를 일깨워줍니다. 그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 회화의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던 캔버스의 ‘앞면’을 뒤집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가려진 ‘뒷면’을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일구어냈습니다.


재료의 미학 ... 거친 마대자루, 삶의 날것이 지닌 정직한 표정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가장 먼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세련된 캔버스 천이 아닌, 성글고 거친 마대자루(마포)의 텍스처입니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이 황폐하고 결핍되었던 시절, 작가는 미군 군량미 자루나 시장 바닥에서 흔히 뒹굴던 삼베와 마대를 화실로 가져왔습니다. 시대의 가난과 상처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가장 낮고 흔한 재료를 예술의 바탕으로 삼은 것입니다.

ANUKAM이 바라보는 하종현의 재료는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가공된 안락함과 결을 달리합니다. 흙과 나무, 그리고 고단한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마대의 질감은 오히려 숨김이 없어 정직합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그 자체로 단단하고 포근하게 대지의 기운을 전하는 재료, 그 날것의 촉각이 자극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가장 먼저 따뜻하게 품어 안아줍니다.


행위의 미학 ... 배압법(背壓法), 안에서 밖으로 밀어 올리는 묵직한 힘

하종현의 그림은 캔버스 위에 붓으로 무언가를 칠하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는 마대자루 뒷면에 걸쭉하고 두꺼운 진흙 빛깔의 유성 물감을 듬뿍 바른 뒤, 앞면의 성긴 격자무늬 틈새로 물감이 배어 나올 때까지 흙손이나 칼, 혹은 자신의 손을 이용해 온 힘을 다해 밀어냅니다. 이 독창적인 방법론을 '배압법'이라 부릅니다.

이 행위는 작가의 온몸과 거친 물질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숭고한 투쟁이자 정직한 신체적 노동의 과정입니다. 캔버스 뒷면에서 밀려 나온 물감들은 격자 틈새로 밀려 나와 굳어지며,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의 흔적들을 앞면에 새겨놓습니다. 안쪽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서사들이 밖으로 힘차게 흘러나와 비로소 숨을 쉬는 역동적인 화면, 그 정직한 밀어냄의 몸짓이 바라보는 이에게 기묘한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정서의 미학 ... 접합(Conjunction), 내면의 상처를 덮어주는 단단한 지지대

작가는 이 작업 과정을 물질과 신체의 '접합'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는 단지 재료의 결합을 넘어, 우리 내면에 고여 있는 말 못 할 슬픔이나 시대의 결핍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마주하여 치유해 내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뒷면의 어두운 물감이 성긴 격자를 통과해 앞면의 단단한 지지대로 피어오르듯, 그 고독한 수행은 상처를 단단한 온기로 바꾸어 냅니다.


화려한 기교 대신 거친 노동의 흔적으로 가득 찬 하종현의 접합은 우리에게 겉모습을 매끄럽게 꾸미느라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당신의 거친 삶의 결 그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조용히 위로를 건넵니다. 인위적인 조작을 걷어내고 가장 정직한 온도로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ANUKAM의 철학이 그의 캔버스 위에서 묵직한 안식으로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마치며 : 투박한 물질 속에서 발견하는 가장 정직한 휴식

하종현의 접합을 바라보는 것은, 잘 가꾸어진 온실 속 화초를 감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계절의 비바람을 견뎌내고 묵묵히 대지를 지키고 선 굳건한 고목을 품에 안는 일과 같습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서 내면의 중심을 잡고 싶을 때, 가만히 그의 거친 화면 위로 흐르는 묵직한 물감의 덩어리들을 느껴보세요. 성긴 마대 틈새로 배어 나온 토속적인 온기가 오늘 밤 당신의 방을 가장 아늑하게 채워줄 것입니다.


이 묵직하고 정직한 물질의 위로를 지나, 다음 편에서는 전혀 다른 깊이의 심연으로 우리를 인도할 거장을 만나러 갑니다. 하늘의 색과 땅의 색을 섞어, 마치 거대한 사색의 문과 같은 깊고 아늑한 여백을 보여준 거장, 윤형근의 '천지문(天地門)' 이야기로 우리의 정서적 인테리어 여정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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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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