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영롱한 심연이 건네는 안식, 장승택의 겹 | Vol. 8
유리와 레진의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게 한 투명함
추운 겨울날, 길을 걷다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맑은 얼음웅덩이를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투명한 얼음 표면 아래로 어스름하게 비치는 대지의 흔적들과 그 켜 사이에 고인 아득한 깊이감. 혹은 늦은 밤,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스탠드 불빛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아득함의 기억을 누구나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입니다. 차갑고 딱딱하기만 한 현대의 재료조차, 한 예술가의 숭고하리만치 섬세한 손길을 거치면 지친 우리 영혼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가장 사색적인 안식처가 될 수 있습니다. 빛을 단순히 튕겨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빛을 붙잡아 그 안에 영롱하게 가두어 둔 예술가. 바로 단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승택 화백입니다.ANUKAM 매거진이 정성스레 준비한 단색화 시즌 2 ‘질감의 위로’ 그 세 번째 페이지는 유리와 특수 레진이라는 현대적인 물성 속에 따뜻한 정서의 결을 불어넣은 그의 ‘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선 이진우의 지층이 지닌 묵직한 대지의 품, 김택상의 숨결이 보여준 투명한 대기의 바람을 지나, 이번에는 방 안의 모든 소음을 깊숙이 흡수해 버리는 영롱한 심연의 빛 속으로 걸어가 봅니다.
장승택 작가 | 사진=©한국경제
물성(Material) : 차가운 유리와 특수 레진, 빛을 가두는 그릇이 되다
장승택 작가의 작업실은 붓과 한지 대신 매끄러운 플렉시글라스(특수 아크릴 유리)와 투명한 액체 상태의 레진(수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얼핏 보면 차가운 현대식 실험실을 연상케 하는 이 독특한 공간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회화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실험을 시작합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유리가 지닌 차갑고 인공적인 매끄러움 그 자체에 집중하여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려 했다면, 장승택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이 차가운 재료들을 ‘빛과 온기를 머금는 가장 투명한 그릇’으로 바라보았습니다.ANUKAM의 시선으로 마주한 그의 첫 화면은 신비로운 역설로 가득합니다. 분명 단단하고 매끄러운 인공의 물질인데, 그 표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차갑기는커녕 살포시 손을 얹어보고 싶을 만큼 신비롭고 늑늑한 온기가 배어 나옵니다. 물질의 딱딱함 속에 인간의 숭고한 정신과 다정한 감각을 침전시키는 것, 그것이 장승택 작가가 현대적 물성을 해석하는 그만의 독창적이고 따뜻한 방식입니다.
축적(Accumulation) : 색을 입힌 레진을 붓고 말리는 고독한 연금술
그의 작품이 지닌 영롱한 깊이감은 철저하고 고독한 ‘시간의 연금술’을 통해 완성됩니다. 작가는 아주 미세한 양의 색료를 섞어 투명하게 만든 레진 액체를 유리판 위에 얇고 평평하게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수평을 맞춘 채 그 액체가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하게 굳기를 며칠 동안 가만히 기다립니다. 하나의 켜가 완전히 단단해지면,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아주 살짝 가미한 레진을 다시 붓고 말리는 과정을 수십 번에 걸쳐 우직하게 반복합니다.겹 60-22(2024, 장승택 作) | 사진=©Hakgojae
이 축적의 과정은 단순히 캔버스에 색을 칠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색과 색 사이에 ‘시간의 층위’와 ‘기다림의 두께’를 입히는 행위입니다. 수많은 투명한 켜(Layer)들이 겹치고 겹치면서, 평면이었던 화면은 마침내 깊은 바다나 영롱한 보석의 내부처럼 아스라한 공간감을 획득하게 됩니다. 붓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고르게 쌓인 그 투명한 두께를 바라보고 있으면, 끊임없이 작품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몰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인위적인 터치를 지워낸 자리에 시간의 두께가 남긴 아늑함이 고입니다.
심연(Abyss) : 내면의 소음을 흡수하는 아늑한 안식의 유투(油透)
단색화 시즌 2가 전하는 ‘질감의 위로’는 장승택의 ‘겹’에 이르러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깊은 정서적 침전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의 작품은 감상자의 실루엣이나 방 안의 거친 풍경을 거울처럼 차갑게 튕겨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을 채우던 주변의 비뚤어진 빛들을 온화하게 흡수하여, 여러 겹의 투명한 층위를 통과시킨 뒤 내부에서부터 정제된 은은한 빛으로 다시 발산해 줍니다.겹 150-24(2024, 장승택 作) | 사진=©한국경제
장승택의 작품을 우리의 일상 공간, 가장 아늑해야 할 거실이나 침실 벽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내 안의 복잡다단한 번뇌와 세상의 거친 소음들을 저 깊고 영롱한 심연 속에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과 같습니다. 세련된 화이트 톤의 모던한 인테리어 속에서도, 혹은 아늑한 우드 톤의 공간 속에서도 그의 겹은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되며 공간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매만져 줍니다. 시각적 자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의 시선과 마음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안아 침묵시켜 주는 투명한 심연의 품. 그것이 장승택의 겹이 우리에게 건네는 아늑한 안식입니다.
마치며 : 깊고 영롱한 겹의 품에 마음을 누이는 밤
장승택의 겹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간은, 매일매일 세상에서 부딪히며 생겨난 마음의 스크래치들을 투명하고 단단한 레진의 층위 속으로 부드럽게 침전시키는 평온의 과정입니다. 오늘 밤, 유난히 세상의 자극들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중심을 잡기 힘들다면 장승택 작가가 묵묵히 쌓아 올린 깊고 아늑한 심연의 빛에 마음을 가만히 기대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차가운 유리를 투과해 나오는 영롱한 온기가 당신의 지친 밤을 다정하게 안아줄 것입니다.ANUKAM : 삶을 아늑하게 큐레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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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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