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삶의 균열을 다독이는 시간, 정상화의 메우기 | Vol. 4
무수한 뜯어냄과 채움의 순환이 일군 단단한 안식
살아가면서 마음에 크고 작은 균열이 생기거나 뜻하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서둘러 감추거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깨지고 흠집 난 자리는 부끄러운 것이라 여겨 매끄러운 포장지로 덮어두려 하지요. 하지만 균열을 억지로 덮어둔 마음은 작은 충격에도 다시 쉽게 바스러지곤 합니다. 여기, 우리 삶에 찾아오는 균열을 대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주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캔버스 위를 고의로 깨뜨리고, 그 틈새를 다시 묵묵히 채워 넣는 독특한 과정을 통해 상처를 단단한 위로로 바꾸어내는 시간의 미학자, 정상화 화백입니다.ANUKAM 매거진이 주목한 단색화의 네 번째 숨결은 바로 이 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직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화면과 나누는 고독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내면의 거친 모서리도 부드럽게 다독여지는 아늑한 평온을 마주하게 됩니다.
해체(Deconstruction) : 고독하게 깨뜨리고 가차 없이 뜯어내는 시간
정상화의 화면 앞에 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캔버스 전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사각형의 격자들입니다. 이 정교한 구조는 언뜻 정밀한 기계로 찍어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손끝으로 직접 일구어낸 해체의 흔적입니다. 그는 일반적인 유화 물감을 칠하는 대신,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흙인 ‘고령토(Kaolin)’를 캔버스 위에 두껍게 바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합니다. 고령토는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지만, 동시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무구함과 순수한 백색의 깊이를 지닌 재료입니다.바탕에 바른 흙이 바짝 마르고 나면, 작가는 비로소 칼을 쥐고 화면 앞에 섭니다. 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꼼꼼하게 접어 사방으로 수많은 균열을 내고, 그 깨어진 틈새에 서린 고령토 조각들을 칼끝으로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톡, 톡,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흙 기둥들. 이는 내면에 고여 있는 고통이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날카롭게 직시하며 과감히 비워내는 격렬하고 고독한 해체의 시간입니다.
순환(Circulation) : 메우고 다시 깨뜨리는, 노동과 시간의 무한 루프
조각들이 뜯겨 나가 텅 빈 사각형의 여백이 생기면, 작가는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정성스럽게 밀어 넣어 꼼꼼하게 메웁니다. 메워진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화면은 또 다른 생기를 얻지만, 작가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물감이 완전히 마르고 나면 다시 화면을 접어 또 다른 균열을 내고, 다른 조각을 뜯어내어 또 다른 빛깔의 물감을 밀어 넣는 과정을 일 년 내내 수십 번씩 반복합니다.이 때문에 정상화의 예술에서는 ‘재료’와 ‘행위’를 무 자르듯 나눌 수 없습니다. 행위가 새로운 재료의 상태를 만들고, 그 재료가 다시 다음 행위를 이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순환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캔버스 위에 물리적으로 겹겹이 쌓이는 이 묵묵한 노동의 켜는 지친 우리에게 위로를 건넵니다. 삶이란 단번에 매끄럽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깨어지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실(Conclusion) : 마침내 마주한 격자(Grid), 조선 백자를 닮은 단단한 안식
이토록 모진 해체와 순환의 시간을 온전히 통과한 캔버스의 최종 표면은 결코 거친 상처의 흔적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의 풍파와 가마의 뜨거운 불길을 견뎌낸 조선의 달항아리나 백자의 표면처럼, 은은하고 아늑한 빛을 뿜어냅니다. 여러 겹의 물감이 서로 엉겨 붙어 만들어낸 입체적인 격자(Grid)들은 바라볼수록 깊은 평온함을 선물합니다.철저한 인과관계 속에서 완성된 이 정직한 격자들은, 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묵묵히 채워나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한 영혼의 지평선입니다. 인위적인 세련됨을 걷어내고 가장 나다운 온도로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ANUKAM의 철학이 그의 격자 사이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마치며 : 우리 삶의 균열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밤
정상화의 메우기를 응시하는 것은 내 삶에 생긴 균열을 비난하지 않고, 그 틈새를 더 깊은 존재의 색채로 채워나가는 치유의 시간입니다. 무수히 뜯겨 나갔던 자리가 결국 더 단단한 백색의 깊이로 피어났듯, 우리의 상처 역시 삶을 지탱하는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 따뜻한 다독임이 필요한 오늘 밤, 작가가 일구어낸 정성스러운 시간의 화면을 바라보며 나만의 가장 아늑한 마음의 안식을 취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이 묵묵한 시간의 위로를 지나, 다음 편에서는 비움의 여정(시즌 1) 그 위대한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거장을 만나러 갑니다. 캔버스 위에 생성과 소멸의 점을 찍고 정갈한 선을 그어 내리며, 마침내 나와 세계가 가장 고요하게 조우하는 여백의 기적을 보여준 거장, 이우환의 '여백' 이야기입니다. 공간의 공기마저 정좌하듯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그의 깊고 아늑한 사색의 문은 과연 어떤 위로를 품고 있을지, 기대해 주세요.
ANUKAM : 삶을 아늑하게 큐레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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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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