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마음의 먼지를 쓸어내는 빗질, 박서보의 묘법(Écritures) | Vol. 1
비워내어 비로소 숨을 쉬는 화면
채움의 피로가 극에 달한 순간, 우리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공간, 내 마음을 가만히 누여놓을 수 있는 완전한 무(無)의 여백을 갈망하게 됩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대한 기둥이자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작업은 바로 그 '비움'의 갈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매달린 '묘법(Écritures)' 연작의 탄생 일화는 무척 다정합니다. 어느 날, 겨우 세 살이던 어린 아들이 네모난 공책 칸 안에 글씨를 써넣으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연필로 쓱쓱 낙서를 하며 칸 전체를 지워버리는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아이에게 그 행위는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과 스트레스를 밖으로 밀어내어 스스로를 치유하는 온전한 비움의 몸짓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순수한 손회의 궤적에서 깊은 미학적 구원을 발견했습니다.닥종이 위에 새겨진 고독한 수행의 골짜기
그의 캔버스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세련된 기교가 아니라, 수십 겹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묵묵한 질감입니다. 박서보의 후기 묘법은 한국 고유의 재료인 한지, 즉 닥종이를 물에 듬뿍 불려 캔버스 위에 서너 겹씩 얹는 지루하고 정성스러운 준비 과정에서 출발합니다. 채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부드러운 종이의 살결 위로, 작가는 연필이나 정교한 도구를 이용해 일정한 리듬으로 선을 밀어내고 다시 당기는 행위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합니다.이 격렬하면서도 절제된 노동의 과정 속에서, 밀려 나간 닥종이의 살점들은 화면 위로 밀려 올라와 스스로 단정한 골짜기를 이룹니다. 그것은 마치 이른 아침, 농부가 흙을 소중히 다독이며 정갈하게 일구어 놓은 시골 논밭의 이랑과 고랑을 닮았습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그 규칙적이고 고요한 선의 궤적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시각적 소음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마음에 마법처럼 정돈된 평화와 깊은 안락함이 찾아옵니다.
색채의 단식(斷食)을 통해 마주하는 위로
그의 회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미학은 바로 화려한 색채를 과감히 거두어들였다는 점입니다. 박서보의 화면은 차가운 백색이 아닌, 달항아리나 흙벽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따뜻하고 은은한 유백색, 혹은 자연의 깊은 숨결을 닮은 단조로운 색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작가는 이를 두고 '색채의 단식(斷食)'이라 불렀습니다.우리 눈을 자극하고 현혹하는 수많은 인공의 천연색을 과감히 굶김으로써, 역설적으로 독자의 지친 눈과 지친 마음에 완벽한 휴식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의 색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아라" 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방 안의 은은한 조명처럼 가만히 머물며, 거친 세상에서 할퀴어지고 지친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줄 뿐입니다.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주는 예술
세계적인 큐레이터들이 박서보의 묘법을 사랑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 그림이 지닌 무한한 포용력에 있습니다. 생전에 작가는 언제나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내 그림은 목적이 없다. 내 그림은 나의 생각을 비워내는 흡수지이자, 관객의 고뇌를 받아주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다."현대의 사물들은 저마다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감정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박서보의 묘법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서서 우리가 쏟아내는 일상의 한숨과 슬픔, 고독한 고뇌를 스펀지처럼 온전히 흡수해 줄 뿐입니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다정한 동반자를 만난 듯, 그의 캔버스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줍니다.
마치며 : 오늘 밤, 내 마음의 벽면에 정갈한 선을 긋다
박서보의 묘법 앞에 선다는 것은, 미술관의 한적한 귀퉁이에서 나만을 위해 마련된 가장 고요한 방에 들어서는 일과 같습니다. 무수한 선들의 빗질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여백은, 우리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영혼의 지평선입니다. 수많은 생각과 풀리지 않는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오늘 밤, 작가가 일구어낸 단정한 묘법의 골짜기를 바라보며 우리 마음속 서글픈 소음들을 가만히 쓸어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이 정갈한 비움의 시원을 지나, 다음 편에서는 전혀 다른 몸짓으로 우리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넬 거장을 만나러 갑니다. 거친 마대자루 뒷면에서 온 힘을 다해 물감을 밀어 올리며 대지의 따스함을 증명해 낸 거장,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 이야기로 여정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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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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