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빛과 바람이 머문 투명한 방, 김택상의 숨결 | Vol. 7
물에 물감을 담갔다 말리기를 반복하며 쌓아 올린 찬란한 안식
이른 아침, 알람 소리 대신 창가로 스며드는 은은한 온기에 눈을 뜬 날이 있습니다. 가만히 열어 둔 창문 사이로 코끝을 스치는 신선한 새벽바람, 그리고 부드러운 하얀 커튼을 투과해 방 안 가득 부서져 내리는 맑은 햇살. 그 찰나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거창한 무언가가 곁에 없어도 내 존재 자체가 커다란 자연의 품속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무해하고 순수한 안도감이 차오르곤 합니다. 복잡하고 무거운 일상의 번뇌를 단숨에 정화해 주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가구나 화려한 오브제가 아니라, 이렇듯 우리 곁을 소리 없이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빛과 대기의 호흡일지 모릅니다.ANUKAM 매거진이 주목한 단색화 시즌 2 ‘질감의 위로’의 두 번째 주인공은 캔버스 위에 빛과 바람, 그리고 시간의 가장 아름다운 찰나를 눈부신 레이어로 쌓아 올리는 예술가, 김택상 화백입니다. 지난 이진우 작가의 ‘지층’이 지닌 묵직하고 단단한 대지의 촉각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그의 화면은, 지친 우리 마음에 은은하고 맑은 숨결을 불어넣어 줍니다.
김택상 작가 | 사진=©조선비즈
기다림(Patience) : 물에 색을 풀고,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고요한 시간
김택상 작가의 작업실에는 화가의 가장 친숙한 무기인 붓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을 가만히 ‘우려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사각형의 커다란 수조에 맑은 물을 가득 채운 뒤, 아주 미미한 양의 아크릴 물감을 서서히 풉니다. 물의 표면 위로 은은한 색의 입자들이 부드럽게 번져 나가면, 그 물결 위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생 캔버스 천을 가만히 가라앉힙니다.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천의 미세한 섬유질 속으로 스스로 스며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입니다.김택상 작가 작업 | 사진=©김택상
천이 물을 머금으면 작가는 이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작업실 바닥에 평평하게 뉘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오직 자연의 시간입니다. 인위적인 건조기 대신 강원도의 맑은 햇살과 산뜻한 바람이 물기를 바짝 말려내기를 기다립니다. 담그고 말리는 이 지극히 정적이고 지난한 과정을 수십 번, 길게는 수백 번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택상 미학의 정직한 시작입니다. 화가가 욕심을 내려놓고 대자연과 합작하여 지어낸 화면에는 시간의 밀도가 잔잔하게 고여 있습니다.
레이어(Layer) : 쌓아 올릴수록 맑아지는, 빛의 숨결
서양의 전통 회화에서 물감을 겹쳐 칠하는 ‘덧칠’은 밑색을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단단한 장벽과 같습니다. 칠하면 칠할수록 화면은 두꺼워지고 탁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김택상의 화면은 정반대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물에 담갔다 말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쌓아 올린 투명한 물감의 켜(Layer)들은, 겹치면 겹칠수록 도리어 화면을 더욱 투명하고 깊이 있는 빛으로 채워 나갑니다.Breathing light-In between light purple(2013, 김택상 作) | 사진=©가인화랑
ANUKAM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택상의 캔버스는 마치 깊은 가을날의 아스라한 하늘이나,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맑은 연못을 들여다보는 듯한 신비로운 서정성을 품고 있습니다. 눈으로 가만히 좇다 보면 손끝으로 부드럽게 만져질 것만 같은 미세한 색의 입자들이 화면 위에 안개처럼 잔잔하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명이나 거친 질감으로 감상자를 압도하려 하지 않고, 물감이 종이의 피부 속으로 온전히 스며들어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한 은은함. 시각적 자극과 정보의 과잉에 피로해진 현대인의 눈과 마음에 이보다 더 무해하고 다정한 정서적 환기는 없을 것입니다.
숨결(Breath) : 내 방의 공기를 맑게 바꾸어 주는 아늑한 정화
단색화 시즌 2가 전하는 ‘질감의 위로’는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지난 포스팅의 이진우 작가가 우리 삶의 거친 상처를 덮어주며 묵묵히 받쳐주는 단단한 대지의 품이었다면, 오늘 마주하는 김택상의 숨결은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공중으로 가볍게 띄워주는 맑은 대기의 품입니다.김택상의 작품을 나만의 소중한 공간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캔버스라는 투명한 창문을 통해 자연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사계절의 찰나를 방 안으로 전해 받는 것과 같습니다. 거실이나 침실 벽에 걸린 그의 푸른빛, 혹은 노란빛의 은은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서늘한 습도와 온도가 가장 아늑하게 조율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내면에 쌓여 있던 탁한 소음들과 무거운 번뇌들이 맑은 물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방 안의 공기마저 싱그럽게 정화되는 치유의 순간이 그 투명한 화면 위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마치며 : 찰나의 빛을 마음에 담고 가만히 숨을 고르는 밤
김택상의 숨결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간은 내 안의 과잉된 감정들을 고요한 물에 씻어내고, 우리 영혼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가장 다정하고 정갈한 휴식입니다. 오늘 밤, 유난히 복잡한 생각들로 마음의 무게가 무겁게 가라앉는다면 김택상 작가가 오랜 기다림으로 쌓아 올린 맑은 빛의 레이어를 마음속에 가만히 띄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위적인 세공을 거치지 않은 빛의 온기가 당신의 지친 밤을 부드럽게 다독여 줄 것입니다.무제(2004, 김택상 作) | 사진=©케이옥션
빛과 바람이 만드는 투명한 숨결을 지나, 다음 편에서는 유리와 특수 레진의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 올려, 독자가 그 깊고 영롱한 심연 속에서 궁극의 안식을 마주하게 만드는 거장, 장승택의 '겹' 이야기로 ANUKAM의 다정한 큐레이션 여정을 이어갑니다. 깊은 공간감이 선사하는 또 다른 차원의 따뜻함을 가만히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ANUKAM : 삶을 아늑하게 큐레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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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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