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검은 상처를 덮어낸 대지의 품, 이진우의 지층 | Vol. 6
숯과 한지가 겹겹이 이뤄낸 가장 묵직하고 따뜻한 위로
단색화의 거대한 첫 번째 축이었던 ‘비움의 시원’을 지나오며,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통과한 1세대 거장들이 어떻게 화면 위에서 자신을 철저히 지워내고 영원에 도달했는지 목격했습니다. 박서보의 빗질에서 정돈을, 하종현의 밀어 올림에서 힘을, 윤형근의 번짐에서 깊은 사색을, 정상화의 메우기에서 치유를, 그리고 이우환의 여백에서 정갈한 숨결을 배웠지요. 그 고독하고도 숭고했던 대장정은 우리에게 '덜어내는 안식'이 무엇인지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이제 ANUKAM 매거진은 이 단단한 비움의 토대 위에서, 우리의 일상과 일상의 공간에 조금 더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을 거는 새로운 장, [Season 2. 질감의 위로(慰勞)]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글로벌 미술계가 주목하는 수많은 포스트(Post) 단색화가 중, ANUKAM이 다음 다섯 거장—이진우, 김택상, 장승택, 김춘수, 남춘모—을 선택해 당신의 방으로 초대하려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의 캔버스는 눈으로만 감상하는 차가운 평면을 넘어, 우리의 손끝이 닿았을 때 고스란히 전해지는 촉각적 온기와 자연의 숨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거실과 침실에 이들의 작품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거는 것을 넘어 공간의 공기마저 따뜻하고 아늑하게 바꾸어 내는 '정서적 인테리어'의 시작입니다. 그 찬란한 포문을 이진우 작가가 일구어 낸 묵직한 대지의 품으로부터 열어 봅니다.
이진우 작가 | 사진 = (c)조선일보
상처(Scar) : 스스로를 태워 굳어버린 숯, 그 검은 고독을 마주하다
이진우의 화면을 처음 마주하면, 온통 새까맣게 칠해진 거칠고 거대한 어둠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작품의 가장 깊은 바탕을 이루는 재료는 다름 아닌 '숯'입니다. 숯이 무엇인가요? 푸르던 나무가 뜨거운 불길 속에서 제 몸을 온전히 불태우고 남겨 놓은 고독의 결정체이자, 차마 다 타지 못해 단단하게 굳어 버린 세월의 상처를 닮아 있습니다.작가는 캔버스 위에 이 거친 숯을 올려놓고 손으로 짓이기고 부수며 화면을 까맣게 채워 나갑니다. 그 과정은 마치 우리가 긴 삶을 살아가며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지녀 온, 차마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 주지 못한 거칠고 어두운 내면의 방을 대면하는 듯한 장엄한 몰입감을 줍니다. 세련되게 반짝이는 인위적인 기교 대신, 스스로를 태워낸 자연의 날것이 뿜어내는 정직한 어둠은, 화려한 도심의 소음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온 우리의 시선을 단숨에 침묵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포용(Embrace) : 검은 상처 위에 부드러운 한지를 덮고 쇠솔로 긁어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검은 고독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 시커먼 숯의 상처 위로 얇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강인함을 지닌 한지(조선 종이)를 가만히 덮어 올립니다. 그리고 물을 뿌려 한지가 숯의 가루를 부드럽게 머금게 한 뒤, 거칠고 단단한 쇠솔로 화면을 수없이 치고, 긁어내고, 두드리는 처절한 노동을 시작합니다.한지를 얹고 쇠솔로 긁어내는 이 경이로운 행위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면서 날카롭던 숯의 모서리들은 한지의 보드라운 섬유질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ANUKAM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치열한 프로세스는 상처를 억지로 지우거나 화려하게 감추려는 위선이 아닙니다. 내면의 아픔을 다정한 한지의 온기로 가만히 덮어 주고 안아 주어, 마침내 하나의 단단하고 성숙한 피부로 동화시키는 눈물겹도록 다정한 포용의 과정입니다. 검은 어둠은 종이의 숨결을 만나 은은한 먹색의 평온으로 피어납니다.
지층(Stratum) : 수천 번의 켜가 쌓여 만든, 대지의 깊고 아늑한 위로
오랜 시간의 노동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드러난 화면은 더 이상 날카로운 상처가 아닙니다. 숯과 종이가 서로의 몸을 섞으며 쌓아 올린 표면은, 마치 수억 년의 풍파를 견뎌낸 거대한 절벽의 단면이나 나이테가 촘촘하게 박힌 고목의 피부처럼 묵직하고 아늑한 '지층'을 이룹니다. 종이 틈새로 아스라히 배어 나오는 빛과 어둠의 레이어는 우리의 공간에 웅장하면서도 따뜻한 존재감을 부여합니다.가만히 방에 앉아 그의 지층을 응시하고 있으면,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대지가 우직하게 나를 지켜주고 받쳐주는 듯한 깊은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현대적인 공간이 주는 차가운 세련미 대신, 흙과 나무, 그리고 인간의 오랜 숨결이 깃든 늑늑하고 깊은 온기가 방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조율해 줍니다. 나를 온전히 맡겨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따뜻한 대지의 품, 그것이 바로 이진우의 지층이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의 안식입니다.
마치며 : 우리 삶의 무게를 가만히 받쳐주는 대지의 품을 품는 밤
이진우의 지층을 응시하는 것은 내 안의 거친 상처들이 다정한 촉각의 온도로 서서히 치유되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차가운 도심의 콘크리트 숲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지치고 무거워진 마음이 있다면, 오늘 밤만큼은 이진우의 묵직한 대지 위에 그 무게를 가만히 내려놓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숯의 어둠을 부드럽게 품어 안은 한지의 온기가 당신의 방과 마음에 가장 아늑한 위로를 전해줄 것입니다.무제(2018-19, 이진우 作) | 사진=(c)아트조선
이진우 작가 | 사진=(c)아트조선
시즌 2의 문을 연 묵직한 대지의 숨결을 지나, 다음 편에서는 캔버스 위에 투명한 물을 담갔다 말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바람과 햇살의 찰나를 눈부신 빛의 레이어로 쌓아 올린 거장, 김택상의 '숨결' 이야기로 ANUKAM의 다정한 여정을 이어갑니다. 맑은 빛과 바람이 만드는 또 다른 차원의 안식을 가만히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ANUKAM : 삶을 아늑하게 큐레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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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콘텐츠는 아늑함(ANUKAM)의 시각으로 큐레이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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